대형병원이라는 샤넬백

누군가에게 스포츠카는 일생의 꿈이다.

낮게 깔린 차체, 굵은 배기음, 손끝에 달라붙는 핸들, 속도를 위해 희생한 모든 불편함. 그런 차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스포츠카는 기계가 아니라 고백에 가깝다.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라고 말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그 차를 막히는 출퇴근길에만 몰고, 주말마다 마트 장보기에만 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름은 많이 먹고, 시끄럽고, 트렁크는 작고, 타고 내릴 때마다 허리를 접어야 한다. 차 문은 괜히 길고, 방지턱 앞에서는 신경이 곤두선다. 목적에 맞지 않는 물건은 비싼 만큼 우아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싼 만큼 우스워진다.

병원도 그렇다.

상급종합병원, 대형병원,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병원. 그곳이 필요할 때가 있다. 분명히 있다. 복잡한 병, 드문 병, 여러 과가 함께 봐야 하는 병, 고난도 수술과 중환자 치료가 필요한 순간. 그런 때 대형병원은 스포츠카가 아니라 소방차이고, 항공모함이고, 마지막 방어선이다.

문제는 그 마지막 방어선을 동네 감기약 확인하듯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병원을 고르는 일이 어느새 병을 고치는 선택이 아니라 자기 계급을 확인하는 의식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요즘 예식장에 가면 비슷한 가방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같은 로고, 같은 체인, 같은 표정. 누가 더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해주는 조용한 명찰들. 길거리에는 예전 같으면 임원이나 기업 대표가 탈 법한 커다란 차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뒷유리에는 ‘초보운전’이 붙어 있다. 차는 운전자를 품는 물건이어야 하는데, 운전자가 차 안에서 어색하게 접혀 있다.

한국은 돈을 버는 속도에 비해, 돈을 쓰는 철학이 늦게 자란 나라다. 눈부신 경제성장은 이뤘지만, 무엇을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은 아직 덜 익었다. 그래서 필요에 맞는 선택보다 남이 알아보는 선택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작은 차로 충분한 사람이 큰 차를 사고, 편한 가방이면 되는 자리에 로고를 사고, 동네 병원에서 시작해도 될 일을 서울의 상급종합병원으로 끌고 간다.

건강 문제라고 예외일 리 없다.

내 가족에게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탓하기 어렵다. 부모가 아프면 자식은 불안해진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는 이성을 잃기 쉽다. 배우자가 큰 병을 의심받으면 검색창은 순식간에 지옥문이 된다. 그 마음 자체는 비난할 일이 아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비효율적이 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모든 선택이 합리화되지는 않는다.

최근 서울의 상급종합병원 진료를 받으려고 먼 길을 오가며, 심지어 SRT 무임승차까지 했다는 어르신의 뉴스를 보았다. 그 장면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그분 한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뒤에 깔린 풍경이 더 참담했다. 지방의 병원은 믿을 수 없고, 동네 의사는 불안하고, 서울의 큰 병원 이름표를 받아야 비로소 안심되는 사회. 진료실보다 병원 간판이 더 강력한 진정제가 된 사회.

이게 맞나.

의료체계에는 원래 길이 있어야 한다. 가벼운 문제는 가까운 곳에서 보고, 복잡한 문제는 단계적으로 올라가고, 정말 어려운 치료가 필요한 사람에게 상급병원의 시간과 인력이 집중되어야 한다. 이것은 누군가를 차별하자는 말이 아니다. 한정된 자원을 병의 무게에 맞게 배치하자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길이 무너졌다. 모두가 가장 큰 병원으로 뛰어가고 싶어 한다. 병의 중증도보다 불안의 크기가 접수 순서를 밀어붙인다. 병원은 진료기관이기 전에 안심을 구매하는 백화점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 백화점의 가장 비싼 층으로 올라가야만 자신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다.

국가에는 철학이 필요하다. 특히 의료처럼 모두가 필요로 하지만 모두에게 무한히 줄 수 없는 영역에서는 더 그렇다. 그런데 한국의 의료는 오래전부터 임시방편으로 버텨왔다. 돈은 적게 내고, 서비스는 많이 받고, 의사는 언제나 대기하고, 병원은 언제나 열려 있고, 큰 병원은 누구나 원하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의 달콤한 착각 위에 서 있었다.

여기서 가장 큰 착각이 하나 있다.

의료가 공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말은 맞다. 아픈 사람을 돈과 운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뜻에서 그렇다. 국가가 개입해야 하고, 제도가 필요하고, 사회가 함께 비용을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그 말이 의료인을 공공재처럼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의사도, 간호사도, 의료기사도, 약사도 한 명의 자연인이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고 자식이다. 직업적 책임은 있다. 하지만 사람을 부품처럼 갈아 넣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전문성을 인정받고, 자기 일이 가치 있다고 느끼고, 최소한 사람답게 일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그들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의료인다움’의 자리로 간다. 사명감은 착취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존중 위에서만 오래 버틴다.

군인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았다. 지하철 빈자리에 군인이 앉았다고 민원을 넣고, 군대에서는 젊은이를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값싼 노동력처럼 취급한다. 그러고 나서 왜 다들 군대를 피하려 하느냐고 묻는다. 이상한 질문이다. 존중받는 자리에는 사람이 모인다. 모욕받는 자리에는 변명과 탈출구만 늘어난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의사다운 의사를 원한다면 의사를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 지역의료를 살리고 싶다면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을 벌칙처럼 다루지 말아야 한다. 필수의료를 지키고 싶다면 필수의료를 선택한 사람이 바보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해왔다. 가장 힘든 자리를 가장 위험하고, 가장 외롭고, 가장 손해 보는 자리로 만들어놓고, 그곳이 비었다며 분노한다.

대형병원 맹신은 단순한 환자의 욕심만이 아니다. 그것은 무너진 신뢰의 결과이고, 잘못 설계된 제도의 증상이며, 간판으로 불안을 진정시키는 소비사회적 습관이다. 사람들은 병원을 고르면서 병만 생각하지 않는다. 내 가족에게 이 정도는 해줬다는 자기 위안,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선택, 혹시 잘못됐을 때 덜 후회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함께 고른다.

“그래도 큰 병원이 낫지 않나요?”

이 질문은 틀린 질문이다. 어떤 병에, 어떤 단계에서, 어떤 의사가, 어떤 자원을 가지고 보느냐가 먼저다. 스포츠카가 항상 적절한 차가 아니듯, 대형병원이 항상 적절한 병원은 아니다. 목적지가 골목 안 마트라면 낮고 넓은 차체는 자랑이 아니라 방해다. 감기와 불안과 애매한 통증과 생활습관의 찌꺼기까지 모두 상급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사회에서, 정작 그 병원이 필요한 사람은 더 오래 기다린다.

한국 의료는 지금 이상한 병을 앓고 있다.

암을 진단받고도 병원을 뛰쳐나와 기도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근거 있는 치료를 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은 목이 쉬었다. 개구충제 먹지 말고 항암치료를 받자고, 부적 말고 수술 날짜를 잡자고, 기도만 하지 말고 피검사부터 보자고 오래 울었다. 그런데 이제는 울 힘도 조금씩 사라진다.

한국의 의사들은 한국 의료의 배우자처럼 보일 때가 있다. 오래 참고, 설명하고, 달래고, 붙잡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용히 이혼서류를 꺼낸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어서다.

상급병원은 샤넬백이 아니다. 대형병원은 대형 세단이 아니다. 내 가족의 가치를 증명하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병원은 불안을 과시하는 장소가 아니라 병의 무게에 맞게 써야 하는 사회적 장치다.

그런데 이 단순한 말을 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누구나 최고를 원한다. 그러나 모두가 최고만 향해 달려가면, 최고는 가장 먼저 망가진다. 그리고 그 잔해 위에서 사람들은 또 묻는다.

“왜 이렇게 믿을 병원이 없나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이미 너무 많은 대답이 병원 복도에 버려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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