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주기라는 시험 범위

사람들은 참 성실하게 예습한다.

공룡 발음도 아직 어설픈, 장래희망이 티라노사우루스인 네 살짜리 아이에게는 영어와 숫자를 공부시킨다. 초등학생에게는 공통수학을, 중학생에게는 원어민도 갸웃하게 만드는 영어 지문을, 이제 좀 놀아도 될 줄 알았던 대학교 1학년에게는 직장인이 될 준비를 시킨다. 10만 원짜리 근사한 식당 데이트도 부담스러운 젊은 연인에게는 10억 원짜리 아파트를 상상하게 하고, 이제 한숨 돌려볼까 하는 사람에게는 돈 없는 노후의 불행을 예습시킨다.

예습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인간은 점점 좁아진다.

정작 필요한 건 생애주기 예습인데 말이다.

생애주기는 달력에 적힌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몸과 마음이 지나가는 기후의 문제다. 자연계의 모든 것이 그렇듯 인간에게도 오름과 내림이 있다. 봄이 있고, 여름이 있고, 수확을 핑계로 지친 척하는 가을이 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뼈를 드러내는 겨울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절을 배우지 않고 시험지만 외운다. 몇 살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는 예민하지만, 그 나이에 어떤 몸과 마음이 찾아오는지에는 이상할 만큼 무지하다.

소아청소년기는 자라고 배우는 시기다. 단지 키가 크고 성적표가 쌓이는 시기가 아니다. 마음의 조각을 찾는 시기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견디기 어려운지, 언제 부끄럽고 언제 화가 나는지, 왜 타인의 말 한마디에 하루가 무너지는지 배우는 시간이다. 인격의 토대는 교과서보다 느리고, 학원 시간표보다 제멋대로 생긴다.

이 시기의 예습은 결국 혼자 설 수 있는 어른이 되는 일이다. 온전한 어른. 말은 쉽다. 실제로는 꽤 드문 종이다. 몸만 큰 어른은 많다. 자기감정을 처리하지 못해 주변 사람을 인질로 잡는 어른도 많다. 불안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통제를 책임감이라 우기는 어른도 흔하다.

부모가 할 일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응원하는 일. 그리고 경계하는 일. 자녀가 닮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을 혹시 내가 매일 시범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일. 아이를 바라본다는 핑계로 사실은 내 어린 시절의 결핍을 들여다보는 일.

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설계하는 건축가가 아니다. 자주 흔들리는 비계를 붙잡고 있는 사람에 가깝다. 그러니 아이를 너무 반듯하게 세우려 들수록, 먼저 비틀리는 쪽은 대개 부모다.

청년에게 필요한 예습은 젊음이 유한하다는,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믿지 않는 사실이다.

젊음은 노력해서 얻은 자산이 아니다. 어느 날 정신 차려보니 계좌에 꽂혀 있던 기적 같은 선불금이다. 그래서 대체로 함부로 쓴다. 밤을 새도 버티는 몸, 금방 다시 뛰는 심장,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이 모든 것이 자기 능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젊음은 능력이 아니라 대여품에 가깝다. 반납일이 적혀 있지 않을 뿐이다.

청년은 이 사실을 미리 배워야 한다. 지금 별다른 노력 없이 가진 것들이 머지않아 사라진다는 것. 그러니 더 열정을 불태워도 된다. 더 사랑해도 된다. 더 즐거워도 된다. 물론 실패도 할 것이다. 흑역사도 생길 것이다. 한때의 확신이 나중에는 웃긴 사진처럼 남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젊음은 원래 그렇게 낭비해도 되는 몇 안 되는 재화다. 아껴 쓰다가 만료되는 것보다 조금은 탕진하는 편이 낫다.

다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멀쩡한 척만 하다가, 어느 날 몸이 먼저 늙어버리는 일. 젊음을 관리 대상으로만 대하면 젊음은 금세 보고서가 된다. 보관 상태는 훌륭하지만, 딱히 열어본 적은 없는 파일처럼.

중장년은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이 말이 듣기 싫어서 사람들은 다른 표현을 만든다. 제2의 인생, 인생 후반전, 액티브 시니어, 젊은 중년. 말은 참 친절하다. 그러나 무릎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허리는 광고 카피를 믿지 않는다. 혈압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에 크게 감동하지 않는다.

중장년의 예습은 고통을 기다리는 연습이다. 우울하게 들리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고통은 예고 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 때 가장 잔인하다. 언젠가 올 손님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달라진다. 

재수 없다고 여기던 친구와 오래 마주 앉아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말이 통하기도 한다. 통증도 그렇다. 상실도 그렇다. 예전 같지 않은 몸도 그렇다.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영원히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이 시기에 슬며시 찾아오는 여유도 있다. 젊을 때는 몰랐던 느린 감각이다. 모든 싸움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는 것. 모든 평가에 해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어떤 관계는 그냥 식어가게 두어도 된다는 것.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기술이다. 

중장년은 이 기술을 익히는 시기다. 내려가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계단에서도 크게 다친다.

노년의 예습은 죽음이다.

사람들은 이 단어 앞에서 대개 목소리를 낮춘다. 마치 작게 말하면 조금 늦게 올 것처럼. 그러나 죽음은 예의가 없다. 불러도 오고, 부르지 않아도 온다. 준비한 사람에게도 오고,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받은 사람에게도 온다. 

그러니 노년의 예습은 오래 사는 법만이 아니라 어떻게 떠나고 싶은지 생각하는 일이어야 한다.

내가 바라는 죽음은 무엇인가. 끝까지 치료받는 것인가. 익숙한 방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것인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은가. 아무에게도 폐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 뒤에 숨어 사실은 누구에게도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는가. 

죽음은 의학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 인간의 마지막 문장이다. 남이 대신 써주기 어렵다.

어릴 때부터 자아 발견과 인격 완성이라는 과목을 그럭저럭 예습해 온 사람이라면, 마지막 시험지 앞에서 조금은 덜 허둥댈지 모른다. 

“이만하면 할 만큼 했어. 결과는 어찌 되든 상관없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초연함이 아니라 오래된 숙제의 자연스러운 마감일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묻는다.

네 살 고시를 볼 것인가. 키 크는 주사를 맞힐 것인가. 좋은 직장을 위해 어떤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가. 결혼을 위해 어느 동네 아파트를 준비해야 하는가. 노후 연금은 얼마나 쌓아야 안심할 수 있는가.

물론 이런 것들이 전부 하찮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은 꽤 비싸고, 몸은 쉽게 고장 나며, 불안은 늘 현실적인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돈도 필요하고, 교육도 필요하고, 병원도 필요하다. 

다만 이상하다. 

사람은 평생을 준비하면서도 정작 자기 인생의 계절은 준비하지 않는다.

무엇이 중요한지 묻는 대신, 무엇을 너무 중요하다고 착각해 왔는지 묻는 편이 낫다.

생애주기는 누구에게나 배부되는 시험 범위다. 그런데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다. 다들 옆 사람 문제집만 훔쳐본다. 그러다 어느 날 자기 이름이 적힌 마지막 시험지를 받아 들고서야 깨닫는다.

예습은 늘 엉뚱한 과목에만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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