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지가 않아요.”
진료실에서 70~90대 환자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예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말은 진료실에서 가장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 중 하나다. 사람들은 병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기능이 떨어지는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 무릎이 예전 같지 않고, 소화가 예전 같지 않고, 잠이 예전 같지 않고, 기억이 예전 같지 않다. 몸은 이미 여러 번 신호를 보냈는데, 마음은 아직도 “정상 수리”를 요구한다.
100세 시대라는 말은 참 편리하다. 보험회사도 좋아하고, 건강식품 회사도 좋아하고, 병원 홍보팀도 좋아한다. 국가는 고령화 정책 보고서에 쓰기 좋고, 방송은 장수 마을을 찾아가 된장과 맨발 걷기와 낙천적인 성격을 한데 버무리기 좋다. 이 말 안에는 이상한 낙관이 들어 있다. 조금만 관리하면, 조금만 검사하면, 조금만 먹고 걷고 참고 버티면, 인간은 거의 반영구 제품이 될 수 있다는 낙관.
2024년 《Nature Aging》에 실린 한 연구는 1990년부터 2019년까지 세계에서 기대수명이 긴 국가와 지역의 사망 자료를 분석했다. 호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한국,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홍콩, 미국이 대상이었다. 20세기에 고소득 국가들의 기대수명이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진은 1990년 이후 기대수명 증가 속도가 전반적으로 둔화되었다고 보았다. 이른바 “급진적 수명 연장”, 그러니까 기대수명이 계속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현상은 더 이상 쉽게 관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생물학적 노화 자체를 늦추는 돌파구가 없다면, 이번 세기에 인간 수명이 과거처럼 가파르게 늘어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100세 생존 확률이다. 연구진은 이번 세기에 어떤 출생 집단에서도 100세 생존 확률이 여성 15%, 남성 5%를 넘기는 것조차 낙관적이라고 봤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이 100세까지 산다”는 말은 아직 통계라기보다 광고에 가깝다.
더 잔인한 숫자도 있다. 연구진이 2019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연령별 사망률만 모아 일종의 ‘최상의 조합’을 만들었을 때도 기대수명은 여성 88.68세, 남성 83.17세였다. 심지어 출생부터 50세까지의 사망률을 0으로 만든다고 가정해도 기대수명은 여성 1.0년, 남성 1.5년 정도만 더 늘었다. 젊은 나이의 죽음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이미 높은 기대수명을 크게 밀어 올리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제 수명을 늘리는 싸움은 과거처럼 감염병, 영양실조, 영아 사망과 싸우는 일이 아니다. 노화라는 훨씬 느리고 끈질긴 벽과 부딪히는 일이다.
문제는 늙어가는 몸을 실패한 몸으로 취급하는 태도다. 근대 이후 인간의 수명은 실제로 크게 늘었다. 위생이 좋아졌고, 영양 상태가 나아졌고, 감염병으로 죽는 일이 줄었고, 수술과 약물과 중환자 치료가 많은 죽음을 뒤로 밀어냈다. 한국인의 기대수명도 빠르게 올라왔다. 이제 오래 사는 일은 더 이상 특별한 신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우리는 오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수명은 급히 늘었고, 철학은 천천히 걸었다. 아니, 가끔은 출발조차 하지 않았다.
의학과 과학은 놀라운 방식으로 앞으로 간다. 심장은 더 오래 뛰게 하고, 혈관은 더 오래 열어두고, 암은 더 늦게 자라게 하고, 관절은 갈아 끼우고, 백내장은 걷어내고, 혈당과 혈압은 숫자로 붙잡는다. 각각은 분명한 성취다. 그 성취를 비웃을 생각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그 약 하나가 손자의 결혼식을 보는 시간이 되고, 그 수술 하나가 다시 혼자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 된다.
다만 이상한 점은, 각 분야가 자기 앞의 레일만 보고 달린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특정 단백질을 낮추고, 특정 수용체를 막고, 특정 지표를 개선한다. 의사는 해당 장기의 수치를 본다. 산업은 그 사이에서 제품을 만든다. 모두가 자기 몫의 선의를 갖고 있다. 그래서 더 난감하다. 악당이 없는데도 풍경은 어쩐지 불길하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선의들 사이에서, “그래서 인간은 어떤 노년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자꾸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다.
몸은 단일한 기계가 아니다. 심장이 버틴다고 뇌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고, 신장이 버틴다고 다리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암을 막았더니 치매가 오고, 폐렴을 넘겼더니 섬망이 오고, 골절을 고쳤더니 침대 밖으로 나갈 힘이 사라지는 일이 있다. 한 기관의 승리가 한 인간의 승리로 곧장 번역되지는 않는다. 병원은 부분의 언어에 능하지만, 노화는 전체의 사건이다.
그래서 평균수명만 늘리는 일이 언제나 인간에게 좋은 일인지 묻게 된다. 숫자는 늘어났는데, 그 숫자를 살아낼 몸과 마음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다. 오래 살게 하는 기술과, 오래 살아버린 인간을 이해하는 능력은 다른 문제다.
100세 시대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광고 문구 속의 100세 시대, 등산복을 입고 활짝 웃으며 단백질 음료를 마시는 노인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그런 시대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100세까지 사는 사람은 늘어날 수 있다. 실제로 절대 숫자는 늘 것이다. 인구가 많고, 이미 오래 사는 사람이 많아졌으니 그 끝자락에 도달하는 사람도 많아진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의 표준이 되고, 그 세월이 대부분 건강하고 독립적인 시간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상상은 지나치게 매끈하다. 인간의 몸은 그렇게 단순한 통계표가 아니다.
진료실에서 어떤 질문은 대답하기보다 잠시 멈춰야 한다.
“나아질 수 있습니까?”
환자는 병의 예후를 묻는 것처럼 말하지만, 꼭 그것만 묻는 것은 아니다. 통증이 줄어들 수 있는지, 수치가 좋아질 수 있는지, 약을 바꾸면 덜 힘들 수 있는지. 그런 질문이라면 의학은 어느 정도 대답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질문 속에 다른 바람이 숨어 있을 때다.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가 묻는 것은 회복이 아니라 복원에 가깝다.
의학은 많은 것을 고치지만, 시간을 새것으로 교환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오래 사는 법을 배우는 데 너무 많은 돈을 썼고, 늙어가는 법을 배우는 데는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 죽음을 미루는 기술은 발전했지만, 쇠퇴를 해석하는 언어는 가난하다. 기능이 떨어지는 것을 곧장 비극으로만 읽는 사회에서 노년은 끝없는 보수공사가 된다. 몸은 낡은 건물이 되고, 병원은 관리사무소가 되고, 환자는 자기 몸의 민원인이 된다.
100세 시대라는 말은 희망처럼 들리지만, 때로는 협박처럼 작동한다. 당신도 관리하면 오래 살 수 있다. 오래 살지 못하면 관리가 부족했던 것이다. 늙어서 아프면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기능이 떨어지면 운동, 식단, 영양제, 검진, 마음가짐 중 어딘가에서 실패한 것이다. 그렇게 장수의 약속은 조용히 개인의 책임으로 바뀐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여러 기관을 동시에 낡게 가진 존재다. 어떤 사람은 심장이 먼저 늙고, 어떤 사람은 기억이 먼저 흐려지고, 어떤 사람은 근육이 먼저 빠지고, 어떤 사람은 의욕이 먼저 꺼진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생물학이다. 물론 우리는 고통을 줄이고, 불필요한 죽음을 막고, 가능한 기능을 오래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한다. 다만 그 노력의 끝에 “노화가 없는 노년” 같은 상품을 세워두는 순간, 인간은 다시 속는다.
오래 사는 것은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무조건 좋은 삶이라는 말은 너무 게으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긴 욕망이 아니라, 더 정직한 감각인지도 모른다. 몸이 더 이상 마음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감각. 남은 기능을 수치가 아니라 생활로 보는 감각. 더 살고 싶다는 마음 뒤에 숨은 공포를, 건강관리라는 말로만 덮지 않는 감각.
100세 시대가 오지 않는다는 말은 절망보다 확인에 가깝다. 인간의 생명은 끝없이 관리하고 연장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확인. 몸은 그 단순한 사실을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다.
몸은 끝내 우리보다 솔직하다.
1. Olshansky, S.J., Willcox, B.J., Demetrius, L. et al. Implausibility of radical life extension in humans in the twenty-first century. Nat Aging 4, 1635–164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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