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암, 큰 소동

암이라는 단어는 너무 세다.

의사가 아무리 차분하게 말해도, 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머지 설명은 배경음악이 된다. “작다”, “예후가 좋다”, “천천히 자란다”, “경과를 볼 수도 있다” 같은 말들은 열심히 뒤따라오지만 이미 늦었다. 환자는 앞의 한 글자에 붙잡힌다. 암.

갑상선암은 특히 그렇다. 대개 조용히 발견된다. 아파서 병원에 온 것도 아니고, 목에 뚜렷한 이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검진을 받았고, 초음파를 했고, 작은 결절이 보였고, 세침검사를 했고, 어느 날부터 암 환자가 되었다. 과정은 합리적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딘가 이상하다.

너무 작은 것이 너무 큰 이름을 얻는다.

갑상선암은 한국 의료사에서 꽤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무서운 암이라기보다 많이 발견된 암이다. 진단은 폭발했는데 죽음은 따라오지 않았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는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가 병을 이긴 것인가, 아니면 병이라고 부른 것이 너무 많아진 것인가.

과잉진단이라는 말은 듣기에 불편하다.

환자 입장에서는 “그럼 내 암이 가짜였다는 말이냐”로 들릴 수 있다. 의사 입장에서는 “그럼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말이냐”로 들릴 수 있다. 병원 입장에서는 더더욱 반갑지 않다. 초음파 기계는 이미 들어왔고, 검진 패키지는 이미 팔리고 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발견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문장을 너무 오래 믿어왔다.

하지만 과잉진단은 가짜 진단이라는 뜻이 아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암일 수 있다. 기록지에도 암으로 남을 수 있다. 다만 그 암이 평생 조용히 있었을 가능성, 그 사람을 괴롭히지도 죽이지도 않았을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발견은 사실이지만, 발견의 의미는 따로 따져야 한다. 모든 발견이 구원은 아니다.

문제는 암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판단이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암 앞에서 사람은 쉽게 겸손해지고, 쉽게 겁을 먹고, 쉽게 수술대 위로 올라간다. “혹시 모르니까”라는 말은 병원에서 가장 강력한 주문이다. 이 주문 앞에서는 확률도 작아지고, 부작용도 흐려지고, 삶의 맥락도 잠시 퇴장한다. 혹시 모르니까 검사하고, 혹시 모르니까 찔러보고, 혹시 모르니까 떼어낸다. 혹시 모른다는 말은 대체로 책임감 있게 들리지만, 가끔은 책임을 피하는 가장 세련된 방식이 된다.

갑상선 초음파는 유능하다. 너무 유능해서 문제다.
작은 결절을 잘 찾는다. 아주 작은 이상도 잘 보인다. 그런데 몸은 원래 깨끗한 유리컵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작은 흔적이 생긴다. 혹도 생기고, 낭종도 생기고, 의미 없는 그림자도 생긴다. 기계가 좋아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게 되지만, 더 잘 판단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보는 능력과 아는 능력은 다르다.

검진 시장은 조용한 병을 좋아한다.
증상이 없어도 불안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확인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확인이라는 단어는 늘 성실해 보인다. “내 몸을 챙기는 사람”이라는 작은 자부심도 준다. 검진센터는 그 자부심을 패키지로 만든다. 간 초음파, 경동맥 초음파, 갑상선 초음파. 이름이 붙으면 선택지가 되고, 선택지가 되면 안 하면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

환자는 소비자가 되고, 소비자는 다시 환자가 된다.
이 순환은 꽤 매끄럽다.

물론 갑상선암이 모두 얌전하다는 말은 아니다. 일부는 분명히 치료가 필요하다. 크기, 위치, 림프절 전이, 조직형, 환자의 상태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문제는 그 복잡한 차이를 “암은 빨리 찾아 빨리 없애야 한다”는 한 문장으로 밀어버리는 태도다. 그 문장은 강력하지만 게으르다. 그리고 게으른 문장은 대개 누군가의 목에 흉터를 남긴다.

수술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갑상선 수술 뒤에는 목소리 변화, 부갑상선 기능 저하, 칼슘 복용, 갑상선호르몬 복용 같은 문제가 따라올 수 있다. 국내 갑상선암 검진 권고안도 무증상 성인에서 초음파를 이용한 갑상선암 검진을 일상적 선별검사로 권고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검진 전 이득과 위해에 대한 정보 제공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람은 위해보다 암이라는 글자를 먼저 본다.
“작지만 암입니다.”
이 말은 너무 세다. 그 뒤에 어떤 통계가 붙어도 이미 늦다. 환자는 그날부터 암 환자가 된다. 가족 단체 채팅방의 분위기가 바뀌고, 보험 약관을 뒤지고,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고, 수술 잘하는 병원을 검색한다. 작은 암 하나가 한 사람의 생활 전체를 재편한다. 몸속의 5밀리미터가 마음속에서는 5미터가 된다.

의료는 자주 이런 방식으로 인간을 구한다.
그리고 가끔은 같은 방식으로 인간을 병들게 한다.

국립암센터는 2020년 보도자료에서 초음파를 이용한 갑상선암 검진이 갑상선암 사망을 줄이는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국 질병예방서비스위원회도 무증상 성인에게 갑상선암 선별검사를 권고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다. 선별검사가 과잉진단과 과잉치료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그 위해가 이득을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묻는다.

“그래도 해보는 게 낫지 않나요?”

이 질문은 틀리지 않다. 다만 너무 외롭다. 병원 문 앞에서 사람은 늘 최악을 상상한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작은 비용, 작은 검사, 작은 불편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검사는 작은데, 발견은 작지 않다. 발견은 다음 검사를 부르고, 다음 검사는 결정을 부르고, 결정은 수술을 부르고, 수술은 평생의 자기소개를 바꿀 수 있다.

“저 갑상선암 수술했어요.”

이 문장에는 병력 이상의 것이 붙는다.
살아남았다는 안도, 겪지 않아도 됐을지 모를 고생, 그리고 누구도 명확히 계산해주지 않는 찝찝함.

갑상선암 과잉진단을 비판한다는 것은 암 환자의 경험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암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사람이 겪는 공포와 치료의 부담을 알기 때문에, 그 이름을 너무 쉽게 붙이지 말자는 말이다. 발견의 능력이 커졌다면, 멈추는 능력도 같이 커져야 한다. 기계가 더 잘 보게 되었으면, 사람은 더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검진은 종교가 아니다.
많이 할수록 착해지는 의식도 아니고, 빨리 발견할수록 무조건 복을 받는 제사도 아니다. 어떤 검사는 생명을 구한다. 어떤 검사는 불안을 생산한다. 그리고 어떤 검사는 병보다 먼저 환자를 만든다.

목 앞쪽의 작은 나비 모양 장기는 조용히 제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열심히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1. Ahn HS, Kim HJ, Welch HG. Korea’s thyroid-cancer “epidemic”: screening and overdiagnosis.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2014;371(19):1765-1767.

2. Lin JS, Bowles EJA, Williams SB, Morrison CC. Screening for Thyroid Cancer: Updated Evidence Report and Systematic Review for the US Preventive Services Task Force. JAMA. 2017;317(18):1888-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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