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약을 부를 때

노인 환자의 약 봉투를 펼쳐보면, 가끔 재난 기록처럼 보인다.

아침 약. 점심 약. 저녁 약. 자기 전 약. 통증약. 위장약. 변비약. 어지럼증 약. 고혈압약. 당뇨병약. 고지혈증약. 수면제. 거기에 홍삼, 오메가3, 관절 영양제, 눈 영양제, 한약 파우치, 누군가가 “이거 진짜 좋다더라” 하고 건넨 정체 모를 갈색 환까지 있다.

환자는 말한다.

“이건 약 아니에요. 건강식품이에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몸속의 간과 신장은 얼마나 억울할까 싶다. 그들은 포장지를 읽지 않는다. 처방전인지, 홈쇼핑인지, 명절 선물인지, 한의원 봉투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들어온 것은 모두 처리해야 할 물질이다. 몸은 철학에 관대하지 않다. 성분에 반응할 뿐이다.

다약제 복용은 보통 다섯 가지 이상의 약을 함께 쓰는 경우를 말한다. 2022년 기준 한국의 75세 이상 노인 환자 중 5개 이상의 약제를 만성적으로 처방받은 비율은 65.4%였다. 2021년 OECD 주요 국가 비교에서도 한국은 15개국 중 4위로 높았다. 이쯤 되면 개인의 부주의라기보다 풍경이다. 노년의 식탁 위에 밥보다 약통이 먼저 올라오는 풍경.

문제는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추가되는 것들이다. 

아픈 곳이 생기면 약이 생긴다. 약을 먹고 속이 쓰리면 위장약이 생긴다.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면 위장운동촉진제가 붙는다. 그 뒤 손이 떨리고, 걸음이 느려지고, 얼굴 표정이 굳으면 신경과 예약이 생긴다. 병이 약을 부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약이 병원 문을 대신 열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무릎이 아픈 78세 여성이 정형외과에서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를 받는다. 통증은 줄었다. 일단 성공이다. 그런데 다리가 붓고 혈압이 오른다. 콩팥 기능이 흔들렸는지는 놓친 채, 다른 병원에서는 부종을 줄이겠다며 이뇨제를 준다. 

이뇨제를 먹으니 밤새 화장실을 간다. 잠을 못 잔다. 또 다른 의원에서는 소변 횟수를 줄이는 약이 붙는다. 그 약을 먹고 입이 마르고, 변비가 생기고, 어지럽다. 균형감각이 흐려진다. 넘어질 뻔한다. 이번에는 어지럼증 약이 붙는다.

처음엔 무릎 하나였다. 몇 달 뒤에는 콩팥, 혈압, 소변, 수면, 어지럼증, 변비가 모두 진료과목이 된다. 환자는 병이 많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약의 그림자가 몸 여기저기에 이름표를 붙인 것일 수도 있다.

이건 억지로 꾸며낸 괴담이 아니다. ‘처방 연쇄’라고 부르는 실제 문제다. 약물 부작용을 새 병으로 오해해 또 다른 약을 처방하는 과정이다. 한국의 사회동향 2024도 노인에서 이런 처방 연쇄가 생기는 이유를 “약물 부작용인지 확인하지 않고 증상만 기준으로 또 다른 약을 처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위장운동촉진제나 항구토제로 쓰이는 레보설피리드, 메토클로프라미드, 클레보프라이드 같은 약물은 한국 노인에서 약물유발 파킨슨증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된다. 약을 먹고 생긴 느림과 떨림이 노화나 파킨슨병처럼 보이는 순간, 환자는 치료받는 것이 아니라 약물 목록의 미로에 들어간다.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도 만만한 약이 아니다. 미국노인의학회 Beers Criteria는 노인에서 이 약들의 만성 사용을 조심해야 한다고 본다. 위장 출혈, 궤양, 천공 위험을 높이고, 혈압을 올리거나 신장 손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3~6개월 사용 시 상부위장관 궤양·출혈·천공이 약 1%, 1년 사용 시 약 2~4%에서 발생한다고 정리돼 있다.

통증은 줄었는데 위가 망가지고, 위를 달래려다 약이 늘고, 약이 늘면서 머리가 흐려진다. 통증 하나가 가족회의 안건이 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환자는 이 과정을 성실하게 따라간다. 병원에 늦지 않고 간다. 약을 빼먹지 않는다. 자식이 사준 건강식품도 버리지 않는다. 한약도 잘 데워 먹는다. 이 비극의 악역은 게으른 환자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성실한 환자다. 문제는 성실함이 방향을 잃었을 때, 약통은 신앙용품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좋다니까 먹는다.”

노년의 건강 소비에서 이 말만큼 위험한 문장도 드물다. 좋다는 말은 대개 누구에게 좋은지, 무엇과 함께 먹어도 되는지, 얼마나 오래 먹어도 되는지, 내 신장 기능과 간 기능에는 어떤지 설명하지 않는다. 좋다는 말은 짧고, 부작용 설명서는 길다. 그래서 시장은 늘 짧은 말을 좋아한다.

한약과 건강식품은 여기서 특별한 지위를 얻는다. 병원 약은 무섭지만, 한약은 순하다고 여겨진다. 처방약은 독하지만, 건강식품은 보탬이 된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참 편리하다. 갈색 액체와 금색 캡슐과 말린 뿌리 앞에서 사람들은 갑자기 과학보다 색감을 믿는다.

하지만 진료실에서 한약은 대개 ‘또 다른 방식의 치료’라기보다 ‘현재 복용 중인 또 하나의 물질’로 취급된다. 의사는 그 안에 어떤 세계관이 담겼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간수치가 왜 올랐는지, 신장 기능이 왜 흔들리는지, 혈당이 왜 튀는지, 출혈 위험이 왜 커졌는지 따진다. 

몸속에서는 동양과 서양이 예의를 갖춰 따로 줄 서지 않는다. 한약, 양약, 건강식품은 대체로 같은 소화관을 지나고, 같은 간과 신장 앞에 선다.

더 불편한 이야기도 있다. 일부 불법 사례에서는 한약이라고 팔린 제품에 현대의학에서 쓰는 전문의약품 성분이 몰래 들어간다. 2019년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전문의약품인 덱사메타손을 넣은 한약을 제조·판매한 한의사를 약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해당 한약 ‘동풍산’ 1포에서는 덱사메타손이 최대 0.6mg 검출됐고, 정해진 방식대로 먹으면 허가된 덱사메타손 하루 최소 복용량의 2.4배를 넘는 양이었다. 

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포털은 스테로이드를 장기 사용하면 체중 증가, 정신장애, 섬망, 우울, 소화기 궤양, 당뇨병, 뼈 대사 이상, 면역저하 등이 생길 수 있고, 한약제에 스테로이드 성분이 포함된 것을 모른 채 장기간 복용해 부작용이 일어나는 사례도 있다고 밝힌다.

이 대목에서 냉소가 아니라 분노가 필요하다.

이건 전통과 현대의 논쟁이 아니다. 그냥 속임수다. 환자는 한약을 먹는다고 믿었지만, 몸은 스테로이드를 처리하고 있었을 수 있다. 믿음은 한의학을 향했는데, 부작용은 약리학의 방식으로 온다. 

스테로이드는 효과가 빠르다. 통증이 가라앉고, 붓기가 줄고, 환자는 감탄한다. 

“역시 한약이 잘 듣는다.” 

그런데 잘 들은 것이 한약인지, 몰래 들어간 전문의약품인지 환자는 모른다. 모르는 채로 감탄한다. 그 감탄은 광고가 되고, 광고는 또 다른 노인의 지갑을 연다. 특효약이라는 말은 대개 설명이 부족한 약의 별명이다.

물론 모든 한약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건강식품이 해롭다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이 변명은 이제 너무 자주 방패처럼 쓰인다. 

“전부 그런 건 아니다”

맞다. 전부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몸이 망가질 때는 전부가 필요하지 않다. 하나면 충분하다. 한 번의 불법 혼입, 한 번의 중복 복용, 한 번의 상호작용, 한 번의 낙상. 노인의 몸에서는 한 번이 대개 충분히 비싸다.

가족의 선의도 이 구조를 부지런히 돕는다. 자식은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 산다. 관절에 좋은 것, 기억력에 좋은 것, 혈행에 좋은 것, 면역에 좋은 것. 노화라는 거대한 무력감 앞에서 택배 송장이라도 붙여야 마음이 놓인다. 

건강산업은 그 죄책감을 아주 잘 안다. 부모의 무릎, 부모의 혈관, 부모의 기억력, 부모의 잠. 상품명은 효도의 언어를 배운 지 오래다.

의료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형외과는 무릎을 보고, 내과는 위를 보고, 신경과는 떨림을 보고, 한의원은 기운을 보고, 건강식품 판매자는 후기를 본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몸 전체를 보는 일은 자주 비어 있다. 

환자는 여러 곳에서 조금씩 친절을 받지만, 전체적으로는 방치된다. 이것이 한국식 의료 소비의 묘한 잔인함이다. 접근성은 좋고, 연결성은 나쁘다. 병원 문은 잘 열리는데, 약통은 아무도 닫아주지 않는다.

노인의 약을 줄이자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필요한 약은 생명을 붙잡는다. 고혈압약은 뇌졸중과 심혈관질환의 위험을 낮추고, 항응고제는 혈전을 막고, 당뇨병약은 합병증을 늦춘다. 약은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모든 불안을 약으로 번역하는 습관이다. 그리고 그 번역을 돈으로 바꾸는 산업이다.

노인의 약통을 열어보는 일은 알약 개수를 세는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통증, 불안, 효도, 의료 시스템의 분절, 판매자의 욕망, 환자의 성실함이 한꺼번에 들어 있다. 약통은 작지만, 그 안의 사회는 꽤 크다.

어떤 노인은 오늘도 약을 한 움큼 삼킨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인지, 병원에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안심을 삼키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몸은 선의를 대사하지 못한다.


1. 스테로이드 제제 섞은 '통풍 특효약' 판매 한의사 적발 | 연합뉴스

2. 노인 약물복용 | 국가건강정보포털 | 질병관리청

3. By the 2023 American Geriatrics Society Beers Criteria® Update Expert Panel. American Geriatrics Society 2023 updated AGS Beers Criteria® for potentially inappropriate medication use in older adults. J Am Geriatr Soc. 2023 Jul;71(7):2052-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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