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 않겠다는 점잖은 발악

요즘 사람들은 늙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노골적이고, 조금 없어 보인다.

대신 말한다.

저속노화.

단어가 좋다.
마치 고속도로에서 과속 딱지를 끊긴 뒤, 이제부터는 안전 운전을 하겠다는 운전자의 다짐 같다. 늙음을 이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거스르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천천히 가겠다는 말이다. 점잖다. 합리적이다. 지적이다. 심지어 약간 교양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꽤 익숙한 얼굴이 있다.
늙기 싫다는 얼굴.

그런데 묘하게도 늙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개 이미 조금 늙어 있다.

분노해서가 아니다.
너무 성실해서 그렇다.

혈당을 관리하고, 근육을 지키고, 수면을 챙기고, 햇빛을 피하고, 술을 줄이고, 스트레스를 관리한다. 할 일은 끝이 없다. 건강은 취미가 아니라 부업이 된다. 월급은 주지 않지만 성과 압박은 있는 부업. 몸은 상사가 되고, 앱은 중간관리자가 된다. 오늘도 손목 위 시계는 말한다. 너는 아직 덜 걸었다.

건강해지고 싶은 마음 자체를 비웃을 수는 없다. 아프지 않고 싶다는 바람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소원이다. 병원에서 몸이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면, 몸이 말을 듣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게 된다. 혈압, 혈당, 근육량, 수면 같은 것들은 실제로 중요하다. 

다만 이상한 것은 건강이 어느 순간 품성검사처럼 변한다는 점이다.

천천히 늙는 사람은 자기관리가 뛰어난 사람.
빨리 늙는 사람은 게으르고 무지한 사람.
배가 나온 사람은 실패한 사람.
단 음식을 먹는 사람은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이쯤 되면 노화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성적표가 된다. 주름은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관리 실패의 증거가 되고, 피로는 삶의 결과가 아니라 루틴 부족의 벌점이 된다. 늙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손님인데, 사람들은 그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까지 등급으로 나누기 시작한다.

저속노화는 참으로 세련된 말이다.
늙음을 부정하지 않는 척하면서 늙음을 최대한 뒤로 밀어둔다.
“나는 젊어지고 싶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노화 속도를 조절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얼마나 우아한 발악인가.

이 발악은 완전히 우스운 농담만은 아니다. 인간은 실제로 오래 살게 되었다. 오래 산다는 말은 이제 특별한 축복이라기보다 꽤 평범한 전망이 되었다. 문제는 그 시간이 전부 말끔한 몸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래 사는 일은 종종 오래 관리받는 일이고, 오래 견디는 일이고, 병원 예약과 약봉지와 검사 결과지를 달력처럼 넘기는 일이 된다. 사람들은 죽음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보다 먼저 찾아오는 긴 쇠약을 두려워한다.

옛날 사람들은 불로초를 찾아 산으로 갔다. 지금 사람들은 건강검진 결과지를 들고 병원과 헬스장과 마트를 오간다.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다 수은이 든 약 앞에 앉았고, 우리는 무가당 그릭요거트 앞에 앉는다. 방향은 조금 나아졌지만 욕망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사람은 늘 작은 도구를 들고 뭔가를 긁어왔다. 누군가는 약초를, 누군가는 화장품을, 누군가는 논문 캡처를 들고.

물론 천천히 늙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적어도 빨리 망가지는 길을 피하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과식, 술, 담배, 수면 부족, 움직이지 않는 생활이 몸을 닳게 한다는 사실은 특별히 신비롭지 않다. 건강한 습관은 마법이 아니라 정비에 가깝다. 자동차 엔진오일을 갈아준다고 폐차를 피할 수는 없지만, 덜 덜컹거리며 갈 수는 있다.

문제는 그 정비가 어느 순간 신앙이 된다는 데 있다. 몸을 돌보는 일은 대체로 좋은 일이다. 덜 달게 먹고, 덜 짜게 먹고, 조금 더 걷고, 잠을 챙기는 일은 몸을 덜 괴롭힌다. 문제는 그 돌봄이 어느 순간 삶 전체를 심사하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케이크 한 조각이 즐거움이 아니라 벌점이 되고, 하루 쉰 일이 회복이 아니라 실패처럼 느껴질 때, 건강은 생활이 아니라 감시 체계가 된다.

이쯤 되면 오래 살기 위해 사는지, 사는 일을 오래 끌기 위해 사는지 헷갈린다.

저속노화라는 말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통제감이다.
노화는 원래 통제되지 않는다. 어느 날 눈 밑이 꺼지고, 어느 날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고, 어느 날 계단이 전보다 길어진다. 몸은 사전 고지 없이 정책을 바꾼다. 그래서 사람은 무언가라도 붙잡고 싶어진다. 식단. 운동. 수면. 영양제. 검사 수치. 그래프. 숫자는 언제나 마음을 진정시키는 척한다.

숫자는 정직해 보인다.
하지만 숫자는 다정하지 않다.

걸음 수는 오늘의 외로움을 모른다.
혈당 그래프는 어제의 회식을 모른다.
수면 점수는 새벽에 깬 이유를 묻지 않는다.
몸은 데이터가 되지만, 사람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저속노화는 건강 담론이면서 동시에 불안 산업이다. 늙음이 무서운 사람에게 “늙지 않을 수는 없지만 천천히 늙을 수는 있다”고 속삭인다. 아주 합리적인 문장이다. 그래서 더 잘 팔린다. 노골적인 불로장생은 촌스럽지만, 과학적인 자기관리는 품위 있어 보인다.

사람들은 이제 젊음을 사지 않는다.
젊음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산다.
스마트워치, 단백질 파우더, 수면 앱, 혈당 측정기, 항산화 세럼. 이름은 다르지만 매대 위의 상품들은 대체로 같은 말을 한다.

당신은 아직 늦지 않았다.
다만 조금 더 관리되어야 한다.

이 말은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꽤 잔인하다.
계속 부족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저속노화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천천히 늙고 싶다는 마음은 우스우면서도 애틋하다. 누구나 자기 몸이 조금 덜 삐걱거리기를 바란다. 병원 문턱을 자주 넘지 않고, 약봉지를 덜 늘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마음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다만 늙음까지 프로젝트로 만들어버리는 태도는 조금 피곤하다.

사람은 결국 늙는다.
아주 성실하게 늙거나, 대충 늙거나, 부지런히 저항하며 늙거나, 아무 생각 없이 늙는다.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방향은 같다. 이 사실은 잔인하지만 공평하다. 공평하다는 점에서 더 잔인하다.

저속노화는 어쩌면 늙음과 화해하는 기술이 아니라, 늙음 앞에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소리를 지르지 않고, 무릎을 꿇지 않고, 대신 귀리밥을 씹으며 시간을 설득하는 방식.

그 모습이 우습다.
그리고 조금 슬프다.

늙음은 언젠가 온다.
우리가 천천히 가자고 부탁해도, 시간은 대개 자기 속도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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