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간다.
그리고 말한다.
“항생제는 안 주시나요?”
이 질문은 이제 거의 인사말에 가깝다. 진료실에 들어와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난다고 말한 뒤, 마지막에 항생제를 확인한다. 마치 식당에서 밥을 시켰는데 김치가 빠졌는지 묻는 것처럼.
하지만 감기는 대개 바이러스 질환이다. 항생제는 세균을 겨냥한 약이다. 바이러스에 항생제를 쓰는 건, 도둑이 들었는데 바퀴벌레 약을 뿌리는 일에 가깝다. 행동은 있었지만, 대상은 틀렸다.
항생제는 ‘센 감기약’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그렇게 믿는다. 해열제보다 세고, 기침약보다 세고, 몸살약보다 센 약. 감기가 오래가면 마침내 꺼내는 마지막 무기. 약봉투 안에 항생제가 들어 있으면 진료를 제대로 받은 것 같고, 없으면 의사가 아낀 것처럼 느낀다.
진료비보다 비싼 스타벅스 커피를 살 때는 이보다 간단했던 것 같다.
항생제를 사는 일은 번거롭다. 의사를 만나야 하고, 처방전을 받아야 하고, 약국도 들러야 한다.
설명은 싫다. 기다림도 싫다.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이 높아서 항생제는 필요 없어 보입니다."
그건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다.
듣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다.
"항생제 드릴게요."
그 짧은 문장이 진료실의 긴 설명보다 훨씬 인기가 많다.
약봉투가 두꺼우면 더 인기가 많다.
이 우스꽝스러운 거래에서 항생제는 치료제가 아니라 영수증이다. 내가 병원에 왔고, 돈을 냈고, 뭔가 강한 조치를 받았다는 증거. 몸속 세균이 아니라 마음속 불안을 겨냥한 싸구려 부적.
문제는 우리가 아픈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는 데 있다. 몸이 회복되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은 너무 초라해 보인다. 물을 마시고, 쉬고, 열이 내려가기를 보는 일은 치료처럼 보이지 않는다. 약봉투가 얇으면 무시당한 것 같고, 설명이 길면 변명처럼 들린다. 그래서 사람은 약을 원한다. 정확한 약이 아니라,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두꺼운 약을 원한다.
항생제는 열쇠와 자물쇠에 가깝다. 세균이라는 자물쇠가 의심될 때, 거기에 맞는 열쇠를 골라 쓰는 약이다. 자물쇠가 없는데 열쇠를 아무 데나 쑤셔 넣는다고 문이 열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열쇠만 닳는다.
그 닳은 열쇠가 항생제 내성이다.
정말 항생제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폐렴, 신우신염, 봉와직염, 패혈증 같은 순간. 그때는 열쇠가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감기 때마다 열쇠를 아무 데나 갈아 넣은 사회에서는, 정작 문 앞에서 열쇠가 헛돈다.
그때 가서 사람들은 묻는다.
“왜 약이 안 듣죠?”
왜긴 왜인가. 감기 기념품처럼 나눠 가진 약들이 언젠가는 청구서를 보낸다.
보건복지부는 이 문제를 모를 리 없다. 항생제 처방률을 공개한다. 지표를 만든다. 평가를 한다. 그래프도 있다. 표도 있다. 공문도 있다.
늘 그렇듯, 종이는 성실하다.
하지만 사람의 인식은 종이로 바뀌지 않는다. 감기에는 항생제가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가가 정말 바꾸고 싶었다면, 지겹도록 캠페인을 했어야 한다. 어린이집에서, 학교에서, 약국에서, 지하철 광고판에서, TV에서, 유튜브에서 떠들었어야 한다.
“항생제는 센 감기약이 아닙니다.”
이 간단한 문장을 사회가 외울 때까지 반복했어야 한다.
정부는 숫자를 좋아한다. 처방률을 공개하고, 지표를 만들고, 평가를 한다. 숫자는 늘 얌전하다. 항의하지 않고, 기침하지 않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지도 않는다.
의사들도 억울한 척만 할 수는 없다.
물론 진료실은 전쟁터다. 커피값보다 싼 본인부담금으로 들어온 환자에게, 3분 안에 감기와 항생제와 바이러스와 자연 경과와 내성균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그래도 항생제 주세요”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설명은 피곤하다.
설득은 더 피곤하다.
처방은 쉽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이 포기한다. 환자가 원하니까. 싸우기 싫으니까. 민원 듣기 싫으니까. 별점 떨어지기 싫으니까. 혹시 나중에 폐렴에 걸리면 왜 항생제를 안 썼냐는 말을 듣기 싫으니까.
그렇게 진료실에는 이상한 평화가 온다.
환자는 원하는 약을 받고, 의사는 갈등을 피하고, 정부는 통계를 만들고, 사회는 내성을 키운다.
모두가 조금씩 편해지고, 미래의 누군가가 대신 망한다.
특히 아이 감기 처방전은 때로 약국 봉투가 아니라 잡화점 영수증처럼 보인다. 기침약, 콧물약, 가래약, 항히스타민제, 해열제, 위장약, 항생제. 어린 몸 하나에 작은 화학 전시회를 차려 놓는다.
한국의 영유아 감기 처방전은 가끔 외국인이 보기 전에 한국인이 먼저 놀라야 할 물건처럼 보인다. 감기는 대부분 시간이 치료한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약을 쌓는다. 많이 넣으면 뭔가 더 한 것 같으니까.
처방전은 점점 길어진다.
생각은 점점 짧아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법원이 등장한다.
80세가 넘은 노인이 폐렴으로 사망한다. 슬프다. 당연히 슬프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령의 몸에서 폐렴은 흔하고, 때로 치명적이다. 의학은 죽음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을 조금 늦추거나 덜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회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과가 나쁘면 책임자를 찾는다. “왜 더 빨리 발견하지 못했나.” “왜 더 강하게 치료하지 않았나.” “왜 항생제를 더 일찍 쓰지 않았나.”
그러면 의사는 배운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덜 맞기 위해 처방하는 법을.
이것을 방어진료라고 부른다. 이름은 점잖지만, 실제로는 공포의 행정 처리다. 환자를 위한 의학과 소송을 피하기 위한 의학이 같은 얼굴을 하고 처방전 위에 앉는다.
이 구조에서 항생제는 너무 편리하다.
싸고, 익숙하고, 환자가 좋아하고, 보호자가 안심하고, 의사가 덜 시달린다. 당장 큰일도 잘 안 난다. 그러니 계속 나간다. 감기에도 나가고, 콧물에도 나가고, 목이 조금 빨개도 나가고, 혹시 모르니까 나간다.
그 “혹시 모르니까”가 한 사회의 의료 문화를 망친다.
항생제를 아예 쓰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세균성 질환이 의심될 때, 필요한 약을, 필요한 용량으로, 필요한 기간만큼 쓰자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다.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아무도 진지하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당연한 것부터 망친다.
감기는 대개 기다림의 병이다. 불편하지만 지나간다. 열이 나고 콧물이 흐르고 목이 아프다. 몸은 몸대로 싸운다. 그런데 사람은 그 시간을 참지 못한다. 아픈 것도 싫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더 싫다.
그래서 항생제를 원한다.
센 약을 원한다.
두꺼운 약봉투를 원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 요구를 조금씩 들어준다. 정부는 캠페인 대신 지표를 만들고, 의사는 설명 대신 처방을 하고, 환자는 이해 대신 약을 요구하고, 법은 자연사 앞에서도 책임자를 찾는다.
그렇게 항생제는 감기약이 된다.
의학적으로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는 이미 그렇다.
감기를 낫게 해서가 아니다. 불안을 잠깐 조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잠깐의 조용함을 위해 우리는 미래의 항생제를 조금씩 망가뜨린다.
바이러스는 죽지 않는다.
세균은 배운다.
사람만 끝까지 모른 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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